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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바람을 쐬면서 아버지를 생각함2025-04-04 11:30
작성자 Level 10

창문을 열었더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바람을 쐬며 소설 한 편을 읽었다.

몇 번 더 읽어야 하는데 잠시 넣어두고,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고열>을 꺼냈다.


<고열>이라는 제목을 보니, 어렸을 때 고열에 자주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너무 많이 아프니까 나중에는 엄마가 관심도 갖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혼자 내과에 가서 주사를 맞고 열이 너무 높아 잠시 쉬다가 집에 왔던 날의 기억.

고열에 시달리면서 발바닥에서 뜨거운 열이 나는 경험을 했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엄마는 집안 일을 하느라 바빴고, 나는 늘 내 방문을 닫고 들어가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는 독방이 있으면 정말 잘 사는 축에 드는 그런 시절이었다.

내 방 안에서 몇 개 안되는 노래 테이프를 듣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백과사전을 뒤적이며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열심히 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탓하지 않으셨다.

모든 공부를 다 잘할 필요는 없다고 하시며, 나처럼 공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늘 자정이 다 되어 술에 취해 들어오셨던 아버지는, 현관문을 열자 마자 나부터 찾으셨다.

항상 안방에 들어가기 전에 내 방문부터 여시며 내가 자는지, 꺠어있는지를 확인하시고, 자든 깨어있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시다가 방문을 닫고 나가셨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피곤하다고 그만 공부하라고 하시며 방 안 전등을 꺼 버리시던 우리 아버지.

잠을 잘 자야 공부도 잘 된다고 하시며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젊으셨던 아버지는 이젠 팔순의 노인이 되셨다.


평범하게 사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아버지는 요즘 자주 웃으신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

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네가 자유롭게 사니까 좋아.

라시며.


내가 고열에 시달리면, 아버지는 자정이 넘어 들어오셔서도 물수건을 해서 이마에 얹어 주시고, 열이 떨어질 때까지 내 곁을 지키셨다.

나는 엄마의 사랑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살았다.

반대로 동생은 아버지의 사랑보다 엄마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살았다.


엄마는 내 성적표에 관심이 많았고, 아버지는 나의 일상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다.

성적이 떨어지면 엄마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웃기만 하셨다.

적당한 성적으로 적당한 지방대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적당하게 살고 있는 딸을 보며, 아버지는 지금도 웃기만 하신다.


오십이 넘은 딸을 어렸을 때처럼 그렇게 아이같이 대해주시는 우리 아버지.

그래서 나는 아직도 철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을 쐬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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