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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일상의 행복2025-04-01 12:38
작성자 Level 10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감기몸살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아버지가 아침에 그러신다.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라고.


체력이 강한 편이었는데, 점점 약해지는 걸 느낀다.

다시 회복되면 운동을 조금씩 해야겠다.


장거리 운전은 힘들어.

5월에는 병원도 세 번이나 가야 해서 목련 보러 영랑생가는 못 갈 것 같아.

라고 아버지께 통보하듯 말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대신 목련 화분을 집에 들였다.

아버지는 수시로 꽃도 피지 않은 목련 화분을 보신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고 식물을 싫어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이젠 동물은 책임지기 힘들고,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마이너스의 손이지만 조금씩 화분을 죽이는 속도를 느리게 하고 있다.

화분은 볼품없어져도 아직 죽은 화분은 없다는 게 위안이 된다.


오전 알바를 마치고 집에 와서 점심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소설 한 편을 읽었다.

오늘은 2014년 등단작들을 읽을 것이다.

십여 년 전의 등단작들이다.

그리고 2014년에는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들을 버티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버지께 지나가듯 물었다.

아버지는 동생이 죽고 나서 내가 동생이 남긴 빚을 갚고 가장 노릇을 할 거라고 생각했었냐고.

아버지는 자신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셨다.

아버지는 빚 정리는 할 자신이 있었냐고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솔직히 자신 없었다고, 암담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빚 정리를 하고 가장으로 잘 살아온 건지 아버지께 다시 물었고, 아버지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잘 살아왔다고 하시며 나를 믿고 사셨다고 하셨다.


십 년 넘게 정말 쉬지 않고 일했지만, 빚 정리를 하고 나니 남은 게 별로 없다.

돈은 없지만, 이젠 무리해서 일하지 않을 거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러라고 하셨다.

몸이 약해졌다고 걱정하시며.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하시며 아침에 나의 출근길을 눈으로 배웅하시는 우리 아버지를 보며, 나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방금 읽은 소설 제목이 <피아노>이다.

나에게 피아노는 일상적인 악기였고, 그러면서도 특별한 악기였다.

내가 유일하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피아노였고, 오랫동안 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건반은 누를 줄 아는 기억력은 남아있다.

피아노와 책, 혹은 피아노와 소설.

그 두가지로 나는 평생을 살아온 것 같다.

오랜 기간 두 가지 다 하지 않았지만, 내 인생의 기초가 되어준 것은 바로 피아노와 소설, 혹은 피아노와 책이었다.


우리 나이는 영원한 퇴직이 힘든 나이이다.

죽는 날까지 일을 해야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유튜브 동영상에는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공부하고 해보라는 동영상들이 많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동영상과 함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잘 알고 있고, 이제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고 글 쓰는 것에 관심을 가졌는데, 내 글을 한번 읽어봐 달라고 아버지께 가져갔다가 내 글이 조사만 남아 있고 한 개도 남아있지 않게 편집된 종이 한 장을 아버지께 도로 건네받은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내 글을 성인이 쓰는 글로 바꾸어 주셨고, 내 글은 아버지가 새로 고쳐주신 글에 비할 바 없이 너무도 어린 내 나이의 글이었다.

아버지는 후배 기자들의 기사를 고쳐주듯 내 글을 고쳐주었고, 나는 아버지가 고쳐주신 어려운 단어가 잔뜩 적혀 있는 글을 멍하니 한참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번도 아버지께 내 글을 고쳐달라거나 읽어달라고 한 적이 없다.

같은 글이 천지차이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그 강한 충격을 받은 그날의 일은 지금도 나에게 깊게 마음속에 남아있다.


늙으신 아버지는 오십살이 넘은 딸이 재롱을 떠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신다.

아버지에게 나는 오십대의 딸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삼십대 아이들에게 했듯, 혹은 그보다 더 어리게 말하고 행동한다.

방 안에서만 주로 사시는 아버지는 나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고 행복해하신다.


유년시절 내내 충분히 사랑받고 살아서 내가 긍정적이고 밝은 것 같다고 하며,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흐뭇해하시며 좋아하셨다.

재벌도 아닌데, 딱히 돈이 엄청 많았던 것도 아닌데, 부모님은 가진 재산에 비해 자식들에게 무한한 투자를 해주셨다.

그래서 대학 때까지 외국 여행과 어학연수도 많이 다녀올 수 있었고, 그 경험으로 평생을 살 수 있었다.

운전면허를 따자 마자 자동차를 사 주시고, 대학졸업하고 일 년 후에 서울로 가겠다는 나에게 무리해서 서울에 집을 얻어주시고, 결혼할 때에도 그 당시 힘들었던 가정 형편에 비해 무리해서 결혼을 시키셨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세대이다.

사랑도 많이 받았고,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것도 많이 받은 세대이다.

그래서 자식과 부모님을 모두 다 부양해야 해서 힘든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대체로 대학을 졸업했고, 자식들도 대학은 졸업시키고 싶어하는 세대이다.

대학이 성공의 길은 아니지만,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전이 판정을 받고 재발한 이후 나는 더 이상 무리해서 아버지께 뭔가를 해 드리지는 않는다.

이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살자고 선언한 이후,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책임감을 많이 내려놓았다.

대신 직장생활을 할 때 해 드리지 못했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아버지의 일상이 소소하게 행복할 수 있도록, 편안할 수 있도록 조금은 신경 쓴다.


아버지는 나의 건강을 걱정하고, 나는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며,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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