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를 살펴 보면, 봄이 되자 겨우내 입었던 코르덴바지의 궁둥이가 반지르르해졌다. 나는 겨우내 이 헐거운 바지만 입었다. 나는 다락문을 배죽 열고 코르덴바지와 소매가 나달나달해진 내복, 털 점퍼, 목도리, 벙어리장갑을 내놓았다. 나는 팬티 바람으로 다락 들창을 열었다. 어느새 겨울 옷가지는 사라지고 없다. 동산에 오르면 아빠가 일하는 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가 점점 자라면서 아빠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고모가 돌아오고 아빠가 아파트로 나가면서 숟가락 젓가락처럼 나란했던 우리는 점점 멀뚱해져버렸다. 고모가 가져온 짐 중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미래를 설계하세요!’라는 글씨 아래 조감도가 그려진 팸플릿뿐이었다. 자꾸 볼수록 팸플릿에 그려진 아파트 뒷동산은 어딘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고모는 그날 밤 잔뜩 술에 취해 벌판에서 보았던 차림의 사내와 깍짓손처럼 얽혀 돌아왔다. 아빠는 이튿날 새벽 사내를 따라 아파트 공사장으로 나갔다. 아빠는 노란 안전모를 쓰고 양말을 대님처럼 바짓가랑이 위로 올리고 워커를 신고 있었다. 막상 아빠가 없는 시간은 심심했다. 고모는 내 공책을 보더니 나더러 벌레만도 못한 새끼라고 했고, 나는 억울해서 고모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학교에서 쫓겨난 건 길버트 때문이라고. 다이애나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아직 학교를 다닐 때이다. 길버트는 내 목덜미를 죄고 다이애나의 가랑이 사이에 들이밀며 핥으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아이들은 나를 슬금슬금 피했다. 나도 앤처럼 다시는 학교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쁜 길버트 같은 아이들하고는 절대 상종하지 않을 거라고. 엄마가 돌아왔다. 내가 밥상을 들고 막 마루로 올라서려고 할 때 마당에서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렸다. 고모가 내 허리춤을 끌어당겼다. 마당 한가운데 넓은 치마가 바람에 나뒹굴었다. 내가 고모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자, 고모는 잠시 멀뚱한 얼굴로 내 아랫도리와 치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마음과 달리 일기장은 내 급한 글씨를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흘렀다. 라는 내용이다. 고아인 앤처럼 고아라고 생각하는 나와 아파트 공사장으로 일을 하러 다니는 아버지, 그리고 함께 살면서 소리를 지르고 구박하는 고모, 다시 돌아온 정상이 아닌 엄마, 길버트와 다이애나 같은 아이들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것을 포기한 나, 그런 나에게 일기장만이 위로가 되어 준다.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소설이었다. 앤과 나의 비슷함, 그리고 내가 일상을 견뎌나가는 힘을 주는 유일한 도구인 일기장을 보며, 쓴다는 것이 뭔지 생각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