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않을 거야." 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고 싶은 일들은 그동안 조금씩 미루며 살아왔다. 작년부터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여행 가는 것도 이젠 미루지 않을 거라고, 일주일쯤은 이제 아주 가끔 혼자 여행을 갈 수도 있다고, 아버지는 요양보호사에게 맡겨두고 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화성에 사는 동생이, 자기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에 함께 여행가자고 했던 말 때문이었다. 늘 아버지 때문에 못 간다고 했던 내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왔다. "비행기 값 왕복 백만원이야. 언니는 그것만 준비하면 돼." 라는 동생의 말에,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여행을 가면 백만원만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이젠 그런 기회도 많지 않을 수 있으니, 놓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갔다 와서 키르기스스탄 소설 한 편 써야 겠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녀가 웃는다.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아야 해요. 일은 천천히 하면 되요. 일단 건강부터 신경 써요. 주말 상담사를 포기했다는 나의 문자에, 화성에 사는 동생이 답장을 보냈다.
문자를 보내지 못했던 동생이, 한글을 많이 배웠다. 음성 메시지로만 문자를 보냈던 동생이, 한글을 직접 써서 나에게 긴 문자를 보냈다.
내 주변에는 나를 챙겨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인연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그 인연이 오래 간다.
주기적으로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문자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필요할 때에만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는 데도, 그들은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 주고, 안부를 물어주고, 만나자고 해 준다.
여행용 트렁크를 새로 장만하고 나서, 딱 한 번 사용한 것 같다. 아버지와 여행했을 때. 그리고 나서 아버지가 건강이 더 안 좋아지셔서, 트렁크는 방 한쪽 구석에 가구처럼 놓여 있다. 언젠가 저걸 사용할 날이 올까.
아프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완치가 불가능해요." 라는 의사의 말에, 잠시 절망했지만, 이내 나는 씩씩해졌다. 관리를 하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내 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조금씩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요즘 내 병은 만성질환이다. 더 이상은 수술도 불가능하고, 완치도 불가능하지만, 아직은 시한부 인생은 아니니까. 요즘 병원에서는 여명을 말해주지 않는다. 의사가 예측하는 것과 실제 환자의 상태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말해준다고 해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살을 빼는 건 포기했다. 그냥 통통한 채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뚱뚱한 건 곤란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조금 뚱뚱하다. ㅎㅎㅎ~^^
아버지는 요즘 컨디션이 좋다. 딸이 밝게 웃고 사니까, 딸이 뭔가를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니까, 딸이 방을 하나 더 얻을 만큼 여유가 있나보다 싶어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팔십살이 되신 아버지는, 기력이 조금 떨어졌다. 드라이브를 할 때에도, 차 안에서 많이 주무신다. 식욕은 여전히 많지 않아서, 뭘 드려도 소식하시거나 안 드시려고 하신다. 가끔 한번씩 연어초밥을 주문해 달라고 하시고, 그러면 나는 남기지 않고 다 드시면 주문해 주겠다고 다짐을 받고 주문하곤 한다.
꼬박꼬박 날마다 소주는 드시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원래 술을 좋아 하신다. 지금은 주량이 많이 약해지셨다.
만취되서 집에 들어와서도 꼭 내 방문을 먼저 여시고, 자고 있는 나에게 혼잣말을 하시던 아버지. 우리 딸, 우리 딸... 하시며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회생활에 대해 조금씩 아이들의 눈높이로 이야기를 해 주시던 아버지. 어렸을 때의 기억이 문득 문득 추억으로 되새겨진다.
미루지 않기. 뭐든 미루지 않기. 가 올해의 내 새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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