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휴가를 냈다. 일주일간의 연차휴가이다.
회사에 일이 줄어서 조금 한가해지니 관리자가 쉬고 싶은 사람들은 장기 연차휴가를 신청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일주일간의 연차휴가를 신청했다.
연차휴가 첫날, 나는 내 고향인 광주에 가서 산수동과 두암동의 경계선상에 있는, 주소상으로는 두암동에 위치한 한 소형 아파트 한 채를, 전세를 안고 매수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을 뒹굴며 방 안에서 밥을 해 먹고 잠을 자고 쉬며 자유롭게 보내다가, 연차휴가 마지막 날인 오늘, 등기권리증이 나왔다고 가지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포승읍에서 광주로 가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운전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전라북도에 들어서서부터 추수가 반쯤 된 누런 논들을 보며 가을을 느끼고 있다.
“참 아름답다. 그런데, 추수가 반쯤 되어서인지 왠지 쓸쓸해보인다.”
하시며 아버지는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하늘에는 구름들이 여러 겹의 흰 띠들처럼 형성되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구름이 참 아름다워요.”
라고 나는 말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울긋불긋 단풍이 예쁘게 물들 터였다.
“올해는 단풍 구경도 한번 가볼까요? 어디로 가고 싶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하셨다.
“단풍구경은 내장산이지.”
라고 말하며.
“올해는 꼭 시간 내서 내장산으로 단풍 구경 가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아이같이 웃으며 좋아하신다.
80세가 다 되어가는 아버지는 요즘들어 부쩍 건망증이 심해졌다. 방금 했던 말도 금새 잊어버리고 또 물어보곤 한다. 걱정이 되어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도 했으나, 치매는 아니라고, 현재로서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담당자의 답변을 들었다.
“아버지, 지금처럼만 늘 건강하세요.”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자동차는 북광주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다.
“다 왔네요, 아버지.”
아버지는 오랜만에 차창 밖으로 고향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북광주 톨게이트를 지나 잠시 달린 후, 율곡초등학교를 지나, 두암동에 있는 아파트 단지 안의 공인중개사 사무소 상가동에 차를 잠시 주차시켰다.
“다 왔어요 아버지. 아버지는 힘드시니까 차에 계세요. 금방 가서 받아올게요.”
나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후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있는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1층 안쪽에 위치해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인중개사 사무실 사장님이 서서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 고객과 면담 중이었다.
“네일샵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마땅한 매물이 있나요?”
고객은 그렇게 물었고, 사장님은 대로변에는 월세가 비싸서 네일샵을 할 만한 마땅한 매물이 없다고 답했다.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어떤가요?”
라고 고객은 다시 물었다.
사장님은 그곳은 월 50만원 정도에 가능하나, 1층 점포가 없다고 답했다.
나를 본 사장님은 나에게 등기권리증을 건네준다. 나는 인사를 하고 등기권리증만 받아든 뒤 재빨리 나오는데 등 뒤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로 가셔야 하나봐요.”
라는.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미소를 짓고 사무실을 나왔다. 종종걸음으로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조수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아버지에게 등기권리증을 내밀었다.
“등기가 나왔네. 딸이 집주인이 되었으니 잘 감상하셔.”
아버지는 즐거운 표정으로 등기권리증을 받아들고 꼼꼼히 살펴본다.
항상 전세나 월세로 살아 왔는데, 이제 고향에 내 집이 생기니 좋았다. 내 이름으로 등록된 등기권리증을 보신 아버지는 흐뭇해하셨다.
“매매 가격은 얼마야? 돈은 어떻게 구했어?“
아버지는 등기권리증을 보며 계속 질문했다.
”전세를 안고 500만원 주고 산 거예요.“
라고 나는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두암동과 산수동의 경계선상에 있는 이 동네에서 십 수년 전에 혼자 산 적이 있다. 갑자기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하며 아버지는 고향인 광주에 방을 한 칸 얻어달라고 했고, 나는 율곡초등학교 뒤쪽 골목에 있는, 전세 천이백만원짜리 단독주택 2층 방을 한 칸 아버지에게 얻어줬다. 2년쯤 그렇게 조용히 광주에서 혼자 살던 아버지는 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때 생각이 났던 걸까. 아버지는 다시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했고, 광주의 어느 지역에서 살고 싶냐는 내 물음에 산수동에서 살고 싶다고 답했다. 아버지가 잠시 살았던 단독주택이 지번주소로 산수동이었다.
인터넷으로 광주의 구축 소형 아파트의 매매가를 검색하고 매물을 검색한 지 일주일 째에 나는 드디어 관심있는 매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남향. 전세 안고 500만원으로 매수 가능. 15층.
이라는 조건의 17평 아파트였다.
아버지가 살았던 산수동의 경계선상에 있는 두암동의 한 소형 아파트였고, 지어진 지 30년이 되어 낡았으나, 90년대 초반에 지어진 아파트는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생각에, 그리고 리모델링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매수를 서둘렀다.
내놓은 가격에서 500만원을 깎아 가격흥정이 끝나자 나는 아버지와 광주로 내려가 매물 상태를 보고 바로 부동산에서 계약을 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위치에 있고, 그 위치가 주거지로서는 살기가 편한 곳이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가 휠체어로 산책을 하기에도 편한 곳이었기 때문에 나의 노후까지 살 수 있는 아담한 아파트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산 아파트가 이 이파트야?“
아버지는 흥분하며 묻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위치가 참 좋다.“
아버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아버지가 살았던 곳이예요. 십 수년 전에 아버지가 산수동 주택에서 살았었잖아요. 율곡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주택에 전세로 살았었는데 그 동네예요.“
아버지는 나의 말을 듣더니,
”그래?“
하시며 좋아했다. 주변을 찬찬히 훑어보며 아버지는 담배를 한 대 핀다.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를 나와서, 늦은 점심 겸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을 눈으로 찾았다. 바로 앞 대로변에 있는 한 돌솥밥집이 눈에 띈다. 작지만 주차장도 있는 식당이었다. 나는 그곳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아버지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나는 영양돌솥밥 2인분을 주문한 후 스마트폰으로 두암동에 대해, 아파트 단지들의 정보에 대해 검색을 한다.
이내 돌솥밥이 나오고, 나물 몇 가지와 양념장, 동치미 물김치가 나왔다.
아버지는 돌솥밥이 맛있다고 했다. 소식하는 아버지는 절반은 먹고 절반은 남겼다. 점심시간을 넘겨서 배가 고팠던 나는 한 그릇을 깨끗하게 싹 비웠다.
돌솥밥을 먹은 후 다시 포승읍으로 출발하기 위해 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무 생각없이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은, 일종의 나의 명상 방법이었다. 삶 속의 명상 방법으로 나는 늘 생각 없이 하는 운전을 택하곤 했다. 쉬는 날이면 별다른 용건이 없어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곤 했다.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그저 달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광주에서 지방대학을 다녔다. 지금은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당시에는 인문학 공부와 세계문학 공부가 대세였다. G대학 인문과학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하고 졸업하던 해에 IMF가 터졌다. 외환보유고가 부족해 국가가 망할지도 모르는 찰나였고, 처음으로 야당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 정권교체가 되었던 시기였고, 시대는 민주화가 되었다고 좋아만 하기에는 너무도 암울한 분위기였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탓에 지방대학을 졸업한 내가 지방에서 취직해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없었다.
나는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원룸을 한 칸 얻어달라고 부모님께 말한 후, 서울로 가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 당시 남동생이 서울에서 벤처기업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남동생과, 부득불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할 수 없이 원룸 한 칸을 얻어주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나는 동생의 벤처사업을 도와주다가 서울 남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다. 남자는 다혈질이고 성격이 급했고, 직업이 없는 무직자였다. 집안은 그럭저럭 살았고, 시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집에서는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하라고 나에게 날마다 전화로 압박을 가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 급하게 결혼을 했다.
5년의 결혼생활 동안, 남자는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인터넷 온라인 게임만을 즐겼다. 돈을 벌 생각도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으며, 은둔형 외톨이처럼 그렇게 본인만의 생활을 이어갔다.
밤이면 나는 방에서 남자를 기다렸으나, 남자는 옆방에서 게임에 빠져 날을 새며 지냈다.
결혼생활 5년 만에 이혼을 결정하고 전남편과 이혼할 때 아버지는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버지는 그렇게 나와 함께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우리 딸이 결정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아빠는 우리 딸의 결정을 믿어.”
라고 했다.
5년이라는 결혼 기간을 채우고, 나는 이혼을 했다. 이혼 서류상 기재한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였다.
“누나도 이혼 사유가 성격 차이야? 어떻게 그게 성격 차이야?”
동생은 나에게 화를 냈다.
이혼한 후 방에서 나오지 않고 누워만 있는 딸을 달래느라 아버지는 날마다 참치회를 사 주며 나에게 맥주를 권했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는 거라고, 우리 딸은 잘 살거라고 위로해주며.
어느새 이혼한 지 18년이 되었다. 전남편에 대한 기억은 이제 희미해졌다. 때로는 전남편의 이름조차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젠 의미 없는 그 이름을 나는 언제부턴가 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90년대 말에, 광주에서 지방방송국 임원으로 일을 하던 아버지는 IMF 때 직원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해고를 했고, 그리고 일년 후, 나를 서둘러 결혼시킨 아버지는, 내가 결혼을 하자 마자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 후 부모님은 광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오랜 기간 일이 없어 심심하고 외로워했다. 나중에는 텔레비전을 보고 독서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사람들과 소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퇴직 사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나는 아버지가 퇴직한 후 십 년이 지난 후 인터넷 검색엔진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조회하여 그날의 퇴직 사유를 알게 되었다. 언론노조 때문에 아버지가 퇴직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었고, 언론노조가 주장하는 아버지의 퇴직 사유는 임원의 인격이 함량 미달이라서였다고 인터넷 신문에 기재되어 있었다. 많이 쓸쓸해하며 퇴사했을 오래 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는 씁쓸해졌다.
이혼 후 나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콜센터 상담사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굵직한 국내 통신사 고객센터와 외국계 은행 고객센터를 거쳐 경력을 쌓으며 돈을 벌었다. 이혼 후 연애 한 번도 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했다. 오랜 직장생활을 통해 약간 넉넉한 목돈을 모았을 때, 벤처기업을 그만두고 십여 년 동안 말없이 직장생활을 하던 동생이 다시 한번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하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목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동생에게 넘겼고, 동생은 IT사업을 하겠다고 하며 그 통장을 받아갔다.
동생은 명문대학을 나온 수재였다. S대학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했고, 유능한 프로그래머였다. 그러나 동생은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사업을 그만두었고, 빚만 잔뜩 남아 있었다. 동생은 무직자가 되었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그의 삶은 점점 황폐해져만 갔고, 어두워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은 영등포의 한 빌딩 옥상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나는 경찰서에 가서 그 소식을 들었다. 동생은 죽으면서 나에게 억대의 빚과 함께 부모님께 증여받은 시골 부동산을 남겼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쉬었던 콜센터 생활을 다시 선택했다. 인터넷 쇼핑몰 고객센터에서 오래 일하며 빚을 갚아 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외 근무, 연장근무, 휴일 근무를 가리지 않고 일을 했고, 그렇게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적 노동인 탓에 피로감은 컸으나, 딱히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딱 십 년 만에 빚 정리를 모두 끝낸 나는 약간의 돈을 더 모은 후 미련 없이 회사를 퇴사했다. 고객센터 상담사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일 년 정도 쉬다가 최근에 포승읍으로 이사를 해서 생산직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콜센터 상담사라는 직업으로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많이 지쳤고, 그래서 차라리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대가 끝나가는 나이에 상담사라는 직업은 이제 퇴직해야 할 나이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고, 제2의 직업을 택해야 할 시기가 왔기 때문이었다.
“현장 일을 하겠다구? 함들지 않겠어?”
대학 시절 삼총사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나를 걱정해 줬다. 나는 씩씩하게 현장 일을 할 거라고 답했고, 그들은 몸 관리 잘하면서 일하라고,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포승읍의 밤은 유난히 깜깜하다. 대로변에는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지만, 골목길은 어두컴컴하다. 포승읍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산다. 포승공단이 있어서 공단에서 일하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이다. 포승에서는 외국인을 찾기는 쉽지만, 한국인을 찾기는 어렵다.
나는 포승읍 시내에서 도보로 10분쯤 걸어오면 형성되어 있는 오피스텔 단지 안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으로 포승공단을 선택하고 포승읍에 주거지를 마련하기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원래 성격이 즉흥적인 탓에, 결정이 빠른 편이고, 그에 따른 만족감과 후회도 빠른 편이다.
포승공단의 한 자동차 부품공장에 취직을 한 지 6개월이 되었다. 이젠 일에 적응도 했고, 공단 생활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잔나가 3개월 뒤에 결혼 때문에 인천으로 이사를 해야 해서 퇴사를 하게 된다.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잔나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며 잘해주고, 일도 차근차근 잘 알려주었다. 공단 생활이 처음인 나는, 그녀가 없었으면 생산직 일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산직 입사 첫날, 나는 제전복을 입고 클린룸으로 들어갔다. 클린룸으로 배치가 되었고, 주임님은 나를 잔나 옆에 배치시켰다.
“한번 잘 가르쳐 봐.”
라고 주임님은 잔나에게 나를 맡기며 말했다.
손이 느려서 간단한 조립도 잘하지 못했던 나에게 잔나는 본인의 방식들을 알려주며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알려주고 익숙해질 수 있게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왜 그렇게 느려요?”
라고 잔나는 나를 종종 구박했으나. 나는 웃으며 받아넘겼고, 그녀와 나는 금새 친해졌다.
그녀는 제품들을 가져오는 일부터 시작해서 조립하는 방법, 조립을 빨리하는 방법, 불량을 내지 않는 방법, 불량의 종류 들을 세세하게 알려주었고, 한 달 동안 나는 그녀 옆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한 달이 되었을 때 그녀와 나는 더 이상 함께 일하지 못했고, 잔나의 공정이 바뀌었고, 바쁘던 회사도 일이 조금 줄어들어 주말 근무가 없어졌다. 처음으로 주말에 쉬던 날, 잔나와 나는 토요일 오후에 포승읍 시내의 양고기 집에서 양꼬치구이에 생맥주를 함께 먹었다. 내가 고맙다고 하며 양꼬치구이를 샀고, 그 다음주에 잔나가 그에 대한 답으로 치맥을 샀다. 그녀는 한국의 양념치킨은 못 먹겠다고 하며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했다. 후라이드 치킨에 생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회사 이야기도 하고 우리의 공정 이야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우리는 주말에 함께 커피전문점에서 바닐라 라떼를 마셨고, 함께 수다를 떨었다.
세세하게 일을 잘 알려줘서 고맙다고 잔나에게 말하자 그녀는,
“주임님이 언니에게 일을 잘 알려주라고 했어요.”
라고,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결혼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말해요. 내가 하나 사 줄게요.”
결혼식을 하지 않고 그냥 서류상으로만 결혼하고 살기로 했다고 그녀가 나에게 말하던 날, 나는 전화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생각해 보겠다며 웃었다.
그녀는 키르기스스탄이 고국이라고 했다. 제2의 고향은 한국이라고 말하며.
키르기스스탄 출신이라는 잔나의 말에 나는 그런 국가명은 못 들어봤다고 하자, 그녀는 다시, 러시아, 라고 답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알아요?”
라고 나는 물었고 그녀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글을 많이 쓴 작가라고 답하자 그녀는 한참 생각하더니
“나스타예프스키! 일기 많이 쓴 사람 말하는 거죠?”
라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국명과 러시아명이 다른가보다 싶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아니고 나스타예프스키!”
라고 그녀는 다시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불러요.”
라고 나는 다시 말했고, 그녀는 그러느냐고 했다.
그녀는 참 한국을 좋아했다. 결혼이민으로 한국에 입국했으나, 이혼을 하게 되어 추방당할 처지에, 다시 재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남자는 탈북민이었고, 덤프트럭 운전기사라고 했다. 신랑감이 성격은 좀 있는 것 같은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잔나는 키르기스스탄에 엄마가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엄마도 한국에 입국해서 목포의 한 모텔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가 그 돈으로 대학생들이 살기에 적합한 소형 원룸을 여러 채 구입해 월세를 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잔나는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하며 잔나는 활짝 웃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엄마가 일하고 있는 모텔에 가서 엄마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어요. 그리고, 입주청소도 해봤어요. 나는 입주청소는 별로예요.”
그녀는 말했다.
그러다가 생산직 직원으로 우리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2년 반의 회사 생활을 곧 끝내고 잔나는 결혼을 한다고 하며 좋아했다.
그녀는 신랑 될 사람의 집이 인천 남동공단 쪽에 있어서 그쪽으로 이사를 할 거라고 했다. 이사 후 두어 달 신혼을 즐기다가, 남동공단에 재취업을 해서 다시 일을 할 거라고 했다.
“돈은 벌어야죠.”
라고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회사는 자동차 부품공장인데,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회사이다. 중견기업 협력업체 이고, 요즘 제조업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회사 사정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연차휴가 기간동안 잔나에게서 이틀에 한 번씩 전화가 왔다. 회사 이야기도 하고 데이트하고 있는 신랑감 이야기도 했다.
“언니, 나 주말마다 데이트 약속 있어서 시간이 없어요. 월요일 날 점심시간에 같이 커피에 빵 먹을래요? 내가 주임님한테 언니 차 타고 약국 간다고 얘기할께요.”
그녀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그러자고 했다.
월요일 날 점심시간에 둘이서 커피전문점에서 빵을 먹으며 그녀는 신랑감에 대해 조잘거릴테고, 나는 즐겁게 들어주며 맞장구 쳐 주겠지.
그녀는 요즘 부쩍 행복해 보인다.
전남편도 탈북민이었다고 했다. 전남편은 일용직을 하다가 시댁에서 노래방을 차려줘서 노래방을 운영했었다고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시부모님이 강제로 이혼을 시켰다고 했다.
“나랑 헤어지고 다시 북한 여자를 만나 아들을 낳고 잘살고 있어요. 참 좋은 남자였지만 나하고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씁쓸해했다. 잔나는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는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북한에 아들과 부인이 있는데, 송금 루트가 차단되어 이젠 북한에 돈을 송금하지 못한다고 했다. 북한의 부인이 사업을 해서 잘 사니 걱정 안 한다고 하며 이젠 북한에 송금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둘이 행복하게 잘 살자고 했다며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재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영주권을 획득한 후 공부를 해서 국적취득까지 할 거라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살고 싶다고 하며 그녀는 꼭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이 복지가 잘 되어 있어 너무 좋다고 하며 그녀는, 자기 고국인 키르기스스탄에는 정치 비리가 많다고 했다. 참 가난한 나라인데 경치는 너무 좋고 물도 많다고 하며 차라리 다 같이 못살았던 러시아 통치 시절이 더 좋았던 것 같다고 그녀는 아쉬워했다. 지금은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다고 말하며. 그녀는 자기네 나라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포승읍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서울에서 포승읍으로 이사하기 전날, 집 앞 시장에서 아버지와 선지국에 소주를 한 잔 했다. 아버지는 내가 생산직 생활을 하겠다고 하니, 착잡해했다.
“월급이 더 많아.”
라고 나는 말했고, 그래도 아버지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하며 착잡해하며 소주를 마셨다.
포승읍으로 이사를 한 후, 주야 교대라 예전 직장보다 삼분의 일은 더 늘어난 월급에 아버지는 놀라며 만족해했고, 그래도 딸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늘 안쓰러워하며 혼자 있는 시간에 티비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거리를 했다.
월급이 늘어난 만큼, 딱 그만큼 몸이 피곤했다. 다만, 정신적인 피로감이 없어서 버틸 수 있었다. 콜센터 상담사는 정신적으로 정말 피곤한 직업인데, 생산직은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편해서 버틸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근태가 좋은 탓인지, 관리자들 눈 밖에 나지 않아서 공정 배치도 나쁘지 않았고, 일도 할 만했다.
요즘 회사에 퇴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회사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들의 상당수가 회사를 그만두고 떠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일을 하러 왔던 미다도 보름 전에 퇴사했다. 고국인 우즈베키스탄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을 할 거라고 했다. 미다는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초등학생의 딸이 있었고, 우즈베키스탄 남자와 의 사이에서 낳은 이제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들도 있었다. 한국인 남편과 이혼을 준비중인 미다는, 한국인 남편과 별거 도중에 아무도 모르게 우즈베키스탄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미다는 남편과 이혼은 하되, 아이는 뺏기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살았는데 시어머니가 방 청소도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하며 이혼할 거라고 했다. 남편이 너무 무능력하다고 덧붙이며. 한국에서는 이혼이 안되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혼이 된다고 말하며, 미다는 이혼 준비를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 이혼 접수를 마무리한 후 다시 한국으로 올 거라고 했다.
빚 정리를 모두 끝내고 홀가분해진 지 딱 2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일을 해서 돈을 모아, 2년 후 전세금을 돌려주고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서 포승읍에서 광주까지 왔다 갔다 하며 살다가 돈을 더 모아서 고향인 광주로 내려가서 살 생각을 하고 있다.
조수석에 앉아 등기권리증을 보고 또 보고, 만지작거리던 아버지는 행복해했다.
”나는 우리 딸이 있어서 다 해주니까 너무 행복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나도 덩달아 배시시 웃었다.
어느새 일주일의 연차휴가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면 다시 나는 월요일부터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제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해서 집에 오겠지. 일주일의 휴가가 끝나가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고향에 가면 뭘할까, 나는 고민했다. 5년 내에 퇴사할 거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고향에 가면 뭘할까 아버지의 생각을 물었다. 아버지는 뜻밖에도, 소설을 쓰라고 했다.
사실 내 오랜 꿈이 소설가였다. 내가 학창 시절을 거쳤던 80년대와 90년대에는 소설가가 명성을 얻던 시기였다. 드라마보다 책을 더 좋아했던 나는, 아버지가 장래 희망을 물을 때마다 소설가, 라고 답해 아버지를 기절시켰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는 그때는 절망했는데, 내 유년 시절의 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다.
”왜 소설을 쓰라고 해?“
라고 묻자, 아버지는 답한다.
”지금 너에게 가장 소프트한 게 소설이니까.”
라고.
하드한 인생을 살다 보니, 아버지는 이젠 딸이 소프트하게 살기를 바라나 보다. 나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나는 잠시 내 오랜 꿈에 대해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에 손에서 놓아버린 습작과 독서를 다시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지금은 일을 하느라 바빠 하지도 못하는데 5년 뒤에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꿈이니까. 이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편히 살아”
아버지는 이 말을 덧붙인다.
수도권에서 25년을 살고 나니, 이젠 고향이 그리워졌다. 주말마다 전라남북도로 드라이브를 다녀도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이젠 고향에서 남은 인생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아버지가 어느새 팔순을 앞두고 있다.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아버지는 나에게 나직하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서평택 톨게이트에서 나와 포승읍 도곡리 방향으로 핸들을 틀었다. 어느새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내일이 보름인가보다. 보름달이 환하게 떴네.”
아버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나는 하늘을 본다. 달이 유난히 커 보인다. 하얗게 뜬 동그란 보름달을 보며 나는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만성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다가,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과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엄마는, 건강이 악화되어 고통을 겪다가, 요양병원에서 혼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칠순이 되기 전에 엄마는 그렇게 급하게 세상을 떠났다.
“다음 생에는 내가 니 딸로 태어날게.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라고, 마지막 면회 때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자동차는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천천히 주차타워에 차를 주차시킨다. 아버지는 어느새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를 손으로 흔들어 깨운다.
꿈을 꾸는 걸까. 아버지는 맛있는 단잠에 빠져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