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람있게 보냈다. 저녁에 마트에서 야채와 소주를 사서 집에 들어오는데, 관리소장님이 인사를 하신다. 그래서 몇 마디 나누었는데, 뜬금없이 나에게 물으신다.
아침에 두 시간 반만 일해요? 그리고 하루종일 집에 있어요? 라고.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취미로 공부하는 것도 있고 해서 아침에 잠깐만 일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신다. 그냥 고시공부해요. 라고 하시며.
그래서 고시공부는 안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고시는 지금 하나씩 다 없어지고 있어요. 라고 덧붙이며. 관리소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왔다.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편한 적이 있었을까 싶다. 마음 편하게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소설을 쓴다고 끄적이고... 내 방값을 벌기 위해 마트에서 오전에 잠깐 일을 하고 나머지는 나를 위한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지금이 제일 행복한 시기이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들을 하나씩 하나씩 읽으며, 단순해진 내 머리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이십대 때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생각이 너무 없어서 문제이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보라고 하셨을까 싶기도 하다.
박상우 작가님의 <말무리반도>에서 꿈과 원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꿈 때문에, 지독한 꿈 때문에 현실이 망가지는 이야기. 그리고 원점이 어디인지를 찾는 주인공 나의 이야기. 꿈과 원점이라는 단어를 소설을 읽으며 오래 오래 생각했다.
나는 오십살로 직장을 퇴사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하긴 했지만. 조금 이른 퇴사이기는 했지만. 콜센터 상담사로 취직하기에는 이제 나이 문제로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젠 건강도 따라주지 않는다.
이젠 아르바이트로 살아갈거야. 그런데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어렵네. 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랜만에 스타벅스에서 밀크티 한 잔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옷가게에서 아버지의 스카프를 한 장 사다 드렸다. 약간 두툼하고 따뜻해 보이는 중성 이미지의 스카프였다. 아버지는 너무 좋아하셨다. 다음에 또 한 장 더 사 드리겠다고 했더니, 돈 쓰지 말라고 하신다. 스카프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니면 돈이 아까운 거야? 라고 내가 물었고, 아버지는 돈이 아까워서. 라고 답하셨다.
노인들은 목감기에 걸리면 안된다고, 따뜻하게 스카프로 목을 감싸드렸더니 아버지가 너무 행복해 하셨다. 우리는 요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즐기며 산다. 서로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에 행복해 하며, 아직은 아버지도 나도 이만큼이나마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해 하며.
가끔 아버지는 딸을 안쓰러워 하신다. 그러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말씀드린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그러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신다. 가끔 나더러, 좋은 소설 많이 써. 라고 하시며.
오늘 하루. 참 보람있고 알차게 보냈다. 소설도 많이 읽고, 아버지도 많이 챙겨드리고, 집안일도 조금 하고, 오랜만에 카페 나들이도 하고...
내일은 다시 오전에 출근이다. 3일 연속 출근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또 하루 쉰다. 주말은 늘 일을 해야 한다. 마트의 특성 상.
이제 슬슬 아버지의 술안주를 챙겨 드리러 잠시 내려갔다 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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