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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아버지와의 데이트2025-01-03 21:24
작성자 Level 10

오후에 아버지와 서울 시내를 한바퀴 돌고 왔다.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서 아버지와 함께 저녁 대신 소주를 조금 마셨다.

아버지는 기분좋게 취하셨고, 얼굴이 벌개져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무신다.


어수선한 나라를 보며, 인간의 본성과 이기심, 이성과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경제도, 정치도, 국가 위상도, 기업도, 개인도, 모든 게 불안한 시국.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지금도 나에게 아버지의 생각을 강요하시는 법이 없다.

내 생각이 바보같을 때에도 아버지는 내가 충분히 직접 다 겪어보고 생각하고 느껴보기를 바라시며 기다려 주신다.

오십살이 넘었어도 나는 늘 철이 없고 바보같은데, 아버지는 그런 나를 늘 웃으며 바라봐 주신다.


가족이 다 사라지고 아버지만 남았는데, 이제 아버지가 내 곁에 계실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는 않은 것 같다.

인간은 언젠가 누구나 혼자가 되고, 결국 혼자라는 것에 적응하게 되어 있다.

대학 때에는 혼자 뭘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혼자 하는 것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거나, 뭘 하는 게 오히려 더 낯설 정도로.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인생의 것이라는 글을 읽었다.

인생이 나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내 의지대로 조금은 바꿀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떄문에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해야할 숙제들이 있고, 그 숙제들로 인해 내 인생은 온전히 내 뜻대로만은 살 수 없게 된다.

숙제를 다 끝내고 내 의지대로 살아볼까 생각하는 순간, 나는 어느새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은 정말 나의 것이 아니라, 인생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로 인해 행복해 하시는 우리 아버지.

내게 웃어주시는 아버지를 보며, 나도 행복해진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웃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뿌듯하기도 하다.


내 인생의 숙제는 이제 다 끝나간다.

꼭 해야 하는 숙제는 다 끝났지만, 정작 내 몫의 숙제가 남아 있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시간들, 나를 위해 하고 싶은 일들, 나를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라는 숙제들이.


아버지와 함께 데이트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 생각 때문에 나는 꽤 자주 아버지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나를 정말 사랑해주셨다.

우리 딸, 우리 딸, 하시면서 나만 예뻐해 주셨다.

아들이 질투할 정도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며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사랑 덕분이었을 거다.

그래서 늘 아버지께, 엄마에게, 감사한다.


국민학교 때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했던 내게, 나보다 몇 년 위의 언니가 썼던 책을 가져다 주셨던 아버지.

그 책을 읽으며, 나는 글이라는 게 다 똑같지 않다는 걸, 표현이라는 게 참 다양하다는 걸,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느낌이라는 게 제각각일 수 있음을 배웠다.


아버지는 내가 평범한 행복을 느끼며,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셨다.

능력있고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힘든 결혼생활을 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편안한 남자를 만나 편안한 사랑을 하며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해서 아버지께 늘 죄송했다.


오늘 아버지께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 독특한 결혼생활도, 그로 인한 이혼도, 이혼후의 삶도, 별다른 능력이 없어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나의 삶도 죄송했다고.

나는 누군가의 아내와 누군가의 엄마로 살기 보다는, 그냥 나로 사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하며, 그래서 부모님께 죄송했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아니라고 하며, 잘 살아왔다고 하며, 내 손을 잡으셨다.


요즘은 부쩍 아버지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다.

주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내 도움이 필요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아버지와의 즐거운 데이트 시간도, 단둘이 마시는 소주 한 잔의 추억도, 모두 다 소중하다.


소중한 시간을 실컷 즐기려고 한다.

실컷 즐겨야 나중에 아버지가 내 곁을 떠날 때, 내가 놓아드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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