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마지막으로 우따를 찾아간 건 월드컵을 앞둔 평가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프랑스 대표팀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는 뉴스를 본 날이었다. 그 경기에서 한국은 3대2로 졌지만 경기 내용만큼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쓸쓸한 위로 같다, 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파견 근무가 끝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면회 날에 우따는 개운한 얼굴로 나타났다.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굴지 말자는 것이 우따의 첫 마디였다. 그 말 이후로 우리는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나를 보는 우따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우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우따가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건네는 손과 받는 손이 봉투의 양끝을 쥐고 한참 그 자리에 머물렀다. 편지가 나의 손으로 넘어온 다음 우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하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빛이 드는 문 너머로 들어갔다.
- 나에게 파리와 서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겁함이 영리함이고 침묵이 성숙이라는 것은 8,960km를 날아와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우따와의 만남이 후회스러웠다. 그날들에서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우따를 만나지 않았따면 나는 탁 트인 길을, 누군가가 그런 길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는 길을, 빠르게 달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빛나는 어떤 것을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그 정도의 인간이 되었다는 확신이 없다. 다만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고 그것에 기대었다. 누군가를 짓밟으면 무엇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따에게서 온 편지들을 읽었다. 우따가 보낸 편지는 언제나 같은 문장으로 끝났다.
'더 나은 무엇이 되자. 그때 만나자.'
편지를 읽고 나면 그 위로 우따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그 얼굴은 우는 얼굴이기도, 찌푸린 얼굴이기도, 잠든 얼굴이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내 기억에서 가장 선명한 우따의 얼굴은 웃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내가 우따를 왜 우따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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