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까 그 흉터는 말하자면 내 울음 같은 거야. 수십억 인간 중에 유일한 내 특징. 자그마치 눈을 감고도 보이는 흉터잖아. 아픔이 크고 그 통증이 구체화될수록 개별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지.
- 우연은 기다리지 않은 자에게, 필요는 기다린 자에게 오라.
- 그는 우연과 필연을 결정짓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 무제에는 죽음의 순간을 직면했거나 죽은 동식물은 전혀 찍혀있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사실 그가 찍고 싶었던 건 변태한 삶이 아니라 탈각된 죽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삶에 대한 끝없는 무력감이 느껴지곤 했다. 철저히 죽음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화면 너머의 죽음을 인식하게 하고자 하는 게 목표였다면 적어도 나에게만은 성공한 셈이었다. 숨김으로써 부각되는 진실 같은 것. 떠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력하는 것. 선배는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
- 몸이 굳어갈수록 정신과 감각은 오히려 겹이 벗겨지며 야생동물처럼 예리해지는 듯했다. 그의 귀는 작은 바스락거림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 매섭게 얼어붙은 땅의 냉기가 얼어진 몸을 곧장 밀어냈다. 일어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길고 하얀 꽁지깃으로 눈비탈을 쓸며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 그것은 새였다. 크기는 꿩과 비슷했지만 긴 꽁지깃은 공작을 연상시켰다. 눈가가 유리가루가 섞인 푸른색 잉크를 쏟은 듯 오묘하고 차갑게 빛났고 머리에 같은 색의 댕기깃이 솟아있었다. 멀리서 보면 눈 속에 파란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일 듯했다. 새는 머리를 두런거리며 자신의 족적을 확인하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고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요 속에 눈과 흙, 나뭇잎 위를 밟는 작은 발소리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귀를 두드렸다.
- 가슴이 서늘하도록 매섭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 살아있다는 감각이 그토록 선명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던가.
- 어느 덧 신호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신호를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카메라를 품에 안았다. 그는 무제 안에서 삶을 이어갈 것이다.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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