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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소설] 남현정, 그때 나는 : 2021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2025-03-18 14:35
작성자 Level 10

- 겉으로 보기에 삶은 죽음으로 쉽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후의 30초가 있으므로 산 자는 죽은 자의 세계로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다. 이 30초는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모든 생이 집약된 시간이며 모든 생이 집약되는 불가능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 그러나 이 바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균형을 위해 붉은머리새가 하늘에서 떨어져 죽기를 바라다니.


- 가여운 붉은머리새를 가여워하고만 있었고 못된 토끼의 잔혹함을 비난하고만 있었다. 이 못된 토끼가 피투성이 붉은머리새를 입에 물고 발작적으로 뛰어다니는 동안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무력하게 구경했다.


- 눈 앞에 보이는 구멍을 다 막고 나면 다시 또 다른 구멍이 보였고 그렇게 구멍은 계속 나타났다. 나는 구멍이 보일 때마다 이 짓을 반복했고 이 무용한 짓을 진 빠지게 반복하다가 결국 이 짓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 나는 이미 이 짓의 목적을 잊은 상태였고 더구나 이 멍청하고 단순한 짓에 이상한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는 토끼가 사라진 후로 한참 동안 구멍을 막는 짓을 계속했고 구멍을 막아도 더는 아무런 기쁨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발견되는 구멍을 계속 막고 막고 막고 또 막았다.


- 벌레들아 죽지도 못할 운명보다는 죽을 운명으로 태어나는 게 더 축복일까? 그것이 벌레의 생이라도?


- 나는 이 지팡이만 믿으면 되었고 내가 아무리 궁핍하고 저속한 꼴이라 하더라도 내가 믿기만 한다면 이 성스러운 지팡이는 나를 기필코 지켜낼 것이리라.


- 내가 스스로 죽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은 완전하게 다른 문제였다.


- 나는 내 목줄을 더 꽉 졸라매였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믿기로 했다. 여기 이 빨간 세단과 언덕 위의 악어와 악어 새끼, 또 개 같은 자와 브랜디와 썩지 않은 토마토를 나는 믿어야 했다. 산속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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