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또깍또깍 시계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턴가 귀에서 시계바늘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고객센터 상담사로 일하며 상담하기 힘든 고객들을 상대할 때마다 어김없이 또깍또깍 시계바늘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외갓집 슈퍼마켓 안의 작은 살림집에 놓여져 있던, 벽면 정가운데에 놓여 있던 직사각형의 길고 큰 괘종시계의 시계추 소리처럼 또깍또깍 소리가 들린다.

외할아버지는 늘 분주히 가게와 방 안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가게에 찾아오는 오래된 지인들을 직접 상대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외상으로 물건들도 주었다.

나는 K 인터넷 쇼핑몰 고객센터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또깍또깍 소리는 그 콜을 받은 후 시작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 이전부터 조금씩 시작되었는데 그 콜을 받은 이후 조금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 인입된 화가 난 한 고객의 콜을 받자마자 나는 고객이 속사포같이 퍼부어대는 말에 그 어떤 말로도 대응할 수 없었다.

“당신 사무실에서 앉아서 근무하지? 월급 얼마 받아? 하는 일도 없이 한가하고 팔자 편하게 사무실에서 편히 앉아 낼름 낼름 월급 받아 가는 거지? 왜 그러고 살아? 주제를 알아야지.”

나는 일방적인 고객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분은 편하지 않은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는 분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었다.

그러나 귀에서 언제부터인가 아주 약하게, 아주 가끔씩 들렸던 또깍또깍 소리가 조금 더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엄마가 죽었다. 요양병원에 입소한 지 6개월 만에.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로 전해 들었다. 회사에서 고객의 전화를 받고 있는데 바지 뒷주머니에서 끝없이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아버지였다. 받던 콜을 끝내고 전산을 휴식으로 전환해 둔 후 나는 화장실로 가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죽었다,”

아버지는 슬픈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썩은 감자가 배송되었어요.”

라는 고객의 말처럼 무덤덤하게 들렸다. 귀애서는 다시금 또깍또깍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업무가 끝난 후 팀장에게 보고하고 일주일간의 휴가를 받아 엄마의 장례를 치렀다.

썩은 감자는 환불 처리해 주거나 재배송 처리 해 주면 되지만,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이 조금 실감 나는 휴가 후 출근 첫날 아침이다.

출근길에 나는 혼자 회사가 있는 지식산업센터 건물 1층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한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뒷맛이 유난히 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때론 고소한, 그러나 그 뒷맛처럼 쓴 인생을 살았던 엄마. 엄마는 칠순이 되기 한해 전에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엄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엄마는 만성신부전증과 파킨슨병, 가벼운 알츠하이머, 그리고 우울증 등을 앓았다.

나는 엄마를 보러 한 달에 두 번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사서 요양병원에 갔다. 가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엄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내가 신림동에 반지하 원룸을 얻었던 그 해 겨울날, 엄마가 우울증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는 보증금이 없는 방을 찾았고, 마침내 나는 보증금이 없는, 대학동 버스정류장에서 5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 골목길을 10분쯤 걸어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는 한 원룸 건물의 방 한칸을 계약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신림동의 한 반지하 원룸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기 전 왼쪽에는 화장품 가게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삼겹살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면 한식부페를 파는 고시촌 식당들이 몇 개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전문점이 여러개 있었으며, 편의점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언덕을 10분쯤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골목길이 작게 나 있는데 그 골목길의 외딴 모퉁이에 내가 사는 원룸 건물이 위치해 있었다. 원룸 건물의 바로 오른쪽 골목길에는 중화요리집도 있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집 앞 중화요리집에서 짜장면이나 볶음밥을 먹기도 하고, 커피전문점에서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보증금 없이 월세 25만원으로 운 좋게 싼 방을 얻었던 나는, 공용세탁기를 써야 하는 번거로움을 제외하고는 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싼 방은 그런 불편함을 커버하고도 남았다.

집 바로 맞은편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곳에서 김밥이나 생수, 라면, 편의점 도시락 등을 사서 집에 들어가곤 했다.

함께 살기 시작한 후 석 달 정도는 엄마가 직접 국도 끓이고 밥도 했다.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날은 엄마가 설거지를 도와주곤 했다. 엄마는 파킨슨병으로 인해 근육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힘든 나를 위해 애써 가사일을 돕던 엄마는 거동이 점점 불편해졌고, 걷는 것도 힘들어질 정도로 증상이 나빠졌다. 엄마는 결국 집안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미안하다. 엄마가 이젠 설거지도 못할 것 같아. 직장 생활하느라 힘든데 집안일까지 너 혼자 다 어떻게 하니. 힘들어서 어떻게 해.”

가사일을 돕지 못할 만큼 건강이 나빠지자 엄마는 나에게 미안한 목소리로 힘없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엄마를 위로했으나, 엄마는 힘이 없었고, 눈빛이 슬퍼 보였다.

가사 일에서 손을 떼면서 엄마는 손가락까지 점점 굳어져서 젓가락을 사용하지 못해 숟가락만으로 밥을 먹었고, 그래서 엄마는 중화요리집에서 외식할 때 짜장면 대신 볶음밥을 선택하곤 했다.

“젓가락질이 힘들어서 면을 먹을 수가 없어.”

라고 말하며.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번도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엄마에게 짜장면을 직접 먹여준 일이 없었다. 짜장면 뿐만 아니라 내가 엄마에게 단 한번이라도 직접 음식을 먹여준 일이 없었다.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자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딱히 별다른 치료법은 없다고 하며 증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날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너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아버지랑 오늘 병원에 다녀왔는데 죽을 수도 있대. 엄마가 너한테 많이 미안해.”

하며 엄마는 약간 흐느꼈다.

전화기 너머의 엄마는 울고 있었고, 나는 말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우울증이 악화되어 신경정신과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증세가 나아지지 않아 3개월 단위로 입원이 연장되었고, 결국 일년간의 긴 입원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부터 엄마와 나는 신림동 반지하 원룸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갤러리에 저장된 엄마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엄마는 주황색 폴라리스 겉옷에 두툼한 분홍색 폴라를 입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고 있다. 엄마가 정신병동에서 퇴원을 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겨울날 신림동의 한 까페에서 둘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엄마는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뜨거운 커피는 싫다고 하며. 얼음까지 모두 다 조각내어 깨 먹으며 깨끗하게 남김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던 엄마였다.

“안 추워?”

라고 내가 묻자,

“속이 다 시원해. 얼음을 부숴 먹으면 속이 다 시원해. 너도 한번 먹어봐. 속이 뻥 뚫려.”

라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는 사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나는 겨울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즐겼다.

다른 사진을 한 장 더 본다. 사진 속의 엄마는 고동색 바지와 얇은 분홍색 컬러티를 입고 흰색과 검정색이 섞인 겉옷을 입은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 배경을 보니 병원에 약을 지으러 갔을 때였다. 주기적으로 엄마는 병원에서 약을 지어 먹었다.

내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엄마는 방 안에서 혼자 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가 출근할 때 엄마는 침대에 누워 나를 웃으며 배웅해 주었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간단한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엄마는 식사 준비를 돕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하면 나는 퇴근길에 수입 삼겹살을 사 와서 엄마와 구워 먹곤 했다. 평소에는 감자 된장국이나 간단한 볶음밥 위주의 평범하면서 식재료비가 많이 들지 않는 음식들을 해 먹곤 했다.

반년쯤 이런 일상의 행복을 느끼며 엄마와 둘만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엄마는 월급이 많지는 않아도 직장인인 딸의 출퇴근을 바라보는 재미에 살았고, 나는 엄마와 함께 사는 행복을 느끼며 반년을 보냈다.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기에 우리의 최대의 외식 메뉴는 짜장면이나 볶음밥이었고, 최대의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지만 우리는 소소한 삶의 행복과 재미를 느끼며 6개월쯤 그렇게 살았다.

엄마는 거동이 힘들어지면서부터 점점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 눈치를 보는 엄마가 싫었다. 당당하게, 눈치 보지 않고 살면 될 텐데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미안해하는 엄마가 싫었다.

늘 침대에 누워서 나의 출퇴근을 바라보던 엄마는 어느 날부터인지 혼자 외출을 시도했다. 외출을 하면 제 발로 집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매번 경찰서에서 엄마를 데려가라고 전화가 오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회사를 조퇴하고 엄마를 데리러 경찰서에 가곤 했다.

엄마는 늘 경찰서 안에서 팔짱을 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말이 없었고,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나로서는 엄마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날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금요일 저녁이었다. 저녁 식사를 막 마친 엄마는 몇십 분 동안 침대에 누워 있더니 스르르 일어나 혼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엄마를 뒤따라 나갔다.

엄마는 편의점과 집 사이의 대로변 한켠에 누워 있었다. 차가 다니는 길이라 위험했다. 엄마에게 위험하니 일어나라고 해도 엄마는 도통 일어나지 않았다. 길바닥에 누워서 엄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차 한 대가 지나가려고 하다가 빵빵거렸다.

“아니, 미쳤나? 뭐하는 거야?”

하며 운전석에 있는 나이 지긋한 남성이 소리를 지르며 차는 쌩 하고 엄마 옆을 지나갔다.

나는 엄마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또 카운터와 매대 사이의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린다. 엄마는 내가 없는 날이면 곧잘 편의점 앞 바닥에 앉아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대로 받은,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알바생은 나에게 드디어 불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영업방해로 고소하겠어요!”

라고.

동네에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니 집주인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동네 사람들이 치매 환자가 산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그리고 내가 일을 해야 생활이 가능한데 엄마를 케어하기 힘들지 않느냐며 집주인은 엄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른 원룸 세입자들도 있는데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내 딱한 사정은 잘 알지만 나를 부득이하게 내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엄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라고 집주인은 나에게 강권했다.

그날도 엄마는 냉장고 안의 칡즙을 몇 봉지 챙겨 혼자 밖으로 나갔다. 원룸 건물 앞 맨바닥에 철푸덕 앉아 엄마는 혼자 칡즙을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집에 들어가자.”

나는 엄마를 다독이며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엄마는 완강했다.

“내 한약이야.”

하면서 칡즙을 빼앗길까봐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일어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길거리가 엄마의 방인 듯, 엄마는 언제든지 어디로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새처럼 그렇게 길거리 한복판에 앉아 칡즙을 빨아 먹고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다니는 행인들 몇 명이 그런 엄마를 신기하게 바라보거나 무심히 지나쳤다.

그날 이후 2~3일에 한 번꼴로 경찰서에서 엄마를 모셔 가라고, 길거리 한복판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배회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고, 나는 엄마를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요청하며 집 주소를 알려주곤 했다. 경찰관은 엄마의 프로필을 따로 메모해 두고 길거리를 배회하면 나에게 연락을 해주곤 했다.

나는 엄마와 점점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고집불통인 엄마가 집 밖으로 나가 맨바닥에 앉거나 누워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전화로 몇 군데의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비용을 알아본 후, 입원비가 저렴한, 경기도의 한 외곽에 있는 요양병원에 엄마를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직장생활을 유지해야 해서. 보증금이 거의 없는 반지하 원룸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그럴듯한 핑계로 나를 합리화시켰다.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엄마는 커피, 콜라, 편의점 도시락, 과자 등 유난히 편의점 음식을 많이 찾았다. 저녁 식사로 오랜만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는데 엄마는 많이 먹지 못했다. 속이 좋지 않다고 하며 고기 몇 점을 먹은 후 내 앞에 고기를 다 밀어놓아 주었다.

“너도 잘 먹어야 해. 속이 안 좋아서 나는 못 먹겠어. 어서 먹어.”

라면서.

커피전문점의 통유리창 밖으로 사설 응급차 한 대가 삐뽀삐뽀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단층 건물들이 바둑판 모양처럼 즐비해 있고, 간간이 고층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거리의, 왕복 8차선 도로 위의 차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거나 옆의 차선으로 비켜준다. 사설 응급차는 차들의 사이를 비껴가며 속도를 내어 앞으로 달린다. 엄마를 태운 사설 응급차도 이렇게 달렸을 것이다.

요양병원에 엄마를 혼자 입원시킬 자신이 없었던 나는,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 엄마를 이송할 수단으로 12만원을 주고 사설 응급차를 택해 예약을 해 두었다. 엄마를 입원시키는 날 사설 응급차가 집 앞에 도착해 건장한 삼십대 중반 쯤의 남자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손을 내밀며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의외로 엄마는 남자의 손을 잡고 선뜻 따라나섰다.

분홍색 라운드 면티에 검정색 바지를 입은 엄마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만 있었다.

“이렇게 밖에도 나오고 해야지.”

엄마는 응급차 안에 앉아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원룸 안에서의 생활이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엄마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길 한복판을 방금 달려간 사설 응급차의 삐뽀삐뽀 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그렇게 나는 경기도의 한 외곽 요양병원에 엄마를 입원시켰다. 만성신부전증, 파킨슨병에 이어 알츠하이머 증상까지 있어서 내가 회사에 출근한 사이에 집 밖으로 나가 배회하던, 맞은편 편의점 입구에 걸터앉아 반나절을 보내기도 하고 길거리에 드러눕기도 했던 엄마는 그렇게 병원 안의 실내 한쪽에 놓인 침대 위에 유배되었다.

매번 엄마를 데려가라고 연락이 오던 경찰서의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집 주소를 말해주고 엄마를 집으로 모셔달라고 경찰관에게 부탁한 후 일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에 오는 일도 이젠 없었다. 보살필 엄마가 없어서 시간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나, 딱 그만큼 내 마음속에 허전함이라는 빈 여백이 생겼다.

내가 사는 신림동의 반지하 원룸은 엄마와 함께 살 때는 곰팡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입원하고 나서부터 벽에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곰팡이 소독제를 사다가 벽면을 걸레로 닦고 또 닦아도 곰팡이 자국은 없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집을 관리했길래 곰팡이가 생기지 않게 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신기했다. 곰팡이는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고 순식간에 벽면 전체에 다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 대신 곰팡이와의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2주에 한 번쯤 엄마에게 면회를 갔다. 전복죽, 잣죽, 호박죽 등의 죽 한 가지를 직접 만들어서 보온통에 담아 가고. 마트에서 신선한 과일을 두어 종류 사서 엄마에게 면회를 갔다.

엄마는 죽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는데, 과일은 남김없이 다 먹었다. 딸기, 방울토마토, 머루 등의 과일을 좋아했다.

병원 로고가 박힌 흰 환자복을 입고 표정없이 환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엄마는, 말도 별로 없었고,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식사를 통 안 하세요.”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나에게 말했다.

“외로워. 혼자 있으니까 진짜 외로워.”

라며 엄마는 우울한 눈빛을 보이며 이따금씩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가끔씩이라도 면회를 오는 딸이 있잖아. 나는 이 세상에 혼자인데, 내가 늙으면 면회 올 사람도 없는데 얼마나 외롭겠어. 나보다는 엄마가 조금은 더 낫지.”

라고 나는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러네. 진짜 너는 아무도 없네. 나보다 더 외롭겠네.”

라면서 엄마는 우울한 눈빛을 거두었다.

건강했던 엄마가 병을 앓기 시작한 것도 한순간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50대 중반의 나이에 다니던 회사에서 갑작스레 퇴직을 한 이후 엄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병명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퇴직을 하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버틸대로 버틴 상태였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회사에서 더 버틸 명분이 없어서 본인의 의지와 달리 퇴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퇴직 후 내가 있는 서울로 엄마와 함께 이사를 했다. 고향인 광주를 떠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엄마가 내가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하자고 하여 아버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사를 결심했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수입이 없자 엄마는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주식 거래를 시작했다. 엄마가 주식 증권계좌에 아버지의 퇴직금을 모두 다 입금하고 데이 트레이딩을 하며 처음에는 돈을 버는 것도 같았다. 그러던 찰나에 IMF가 터졌다. 주식시세는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며 끝도 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엄마는 가진 돈을 거의 다 잃었다. 그때부터 엄마의 깊은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많이 아프자 병원비로 많은 돈이 들어갔고, 나중에는 한 채 남은 집마저 팔아야 했다. 아버지는 고향이 좋다고 하며 광주로 다시 내려가 방을 얻어 혼자 자냈고 엄마와 나는 신림동의 반지하 원룸으로까지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가진 것 없는 집안의 외동딸이 되었다. 직장생활을 해서 엄마의 생계는 책임져야 했고, 아버지는 국민연금으로 혼자 생활을 했다. 지방대학을 나온 내가 서울에 와서 취직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입장벽이 낮은 콜센터를 택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서울에서 나와 함께 살았다가 광주로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자 아버지는 나에게서 엄마의 간병이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 노력했다. 그러나 엄마와 아버지는 함께 있으면 지독하게 싸웠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왔다가 아버지에게 갔다가를 반복하며 삶을 유지했다.

갤러리에서 또 다른 사진을 한 장 꺼내 본다. 흰 환자복을 입고 무표정으로 누워 있는 엄마 모습이다. 엄마는 흰 환자복을 입고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얼굴이 헬쓱해진 상태로 침대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늘 이런 모습이었지만, 이 사진은 엄마에게 마지막 면회를 갔던 날의 사진이다.

엄마는 전혀 설탕이 가미되지 않은 씁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고소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희노애락이 있는 우리네 삶의 맛을 닮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우유가 들어간 까페라떼를 좋아했지만 엄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랑했다.

마지막 면회를 갔던 날.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준비해서 엄마에게 갔다.

엄마를 보러 마지막 면회를 갔던 날의 사진을 나는 보고 또 본다.

“오른쪽 발이 많이 부었어요. 나트륨 수치가 떨어지니 물 많이 주지 마세요.”

라고 간호사는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링거를 맞고 있었다. 오른쪽 발은 왼쪽 발의 1.5배만큼 부어 있었다. 간호사가 딸이 왔다고 하자 엄마는 천천히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병어죽과 딸기, 그리고 방울토마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가 엄마 앞에 하나하나 펴 놓았다. 비몽사몽간에 있던 엄마는 이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죽은 먹기 싫다고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딸기와 방울토마토를 남김없이 천천히 몇 시간에 걸쳐 다 먹었다. 후식으로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엄마는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게 웃었다.

과일을 다 먹은 후 엄마는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시간이 흘러 죽을 때 엄마가 널 데리러 와도 돼?”

라고.

나는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누가 데리러 오겠느냐고 하며 당연히 된다고 하자 엄마는 나에게 강조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늙어서 죽을 때 말이야.”

라고.

그러더니 그런다.

“나 얼마 못 산대. 곧 죽는대. 오늘 아침에 의사가 왔다 갔어. 의사가 그러는데 이제 얼마 못 산대.”

라며 엄마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엄마의 여윈 손을 꼭 잡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엄마는 나직하게 나에게 말했다.

“니 덕에 행복했다. 우리 아버지도 나에게 이렇게 안 해줬어. 네가 있어서 엄마는 정말 행복했다. 고맙다. 다음 생에 우리 또 만나자. 그래도 되지?”

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덕에 내가 행복했던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나는 말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공주로 키웠다. 하나뿐인 딸이라고 하며 나에게 좋은 것들을 입히고, 좋은 것들을 손수 만들어 먹이며 곱게 키웠다. 도시락 반찬으로 반 친구들이 멸치볶음이나 어묵볶음을 싸 오던 그 시절, 나는 새우튀김이나 돈까스를 도시락으로 싸 가곤 했다.

하나뿐인 딸을 서울로 대학 입학을 시키고 싶어했던 엄마의 기대와 달리 나는 광주의 한 지방대학에 입학했다. 엄마는 신입생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백화점에서 산 옷들을 나에게 입혔다. 늘 세미 정장으로 차려입거나, 수입 청바지를 입고 대학 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퇴직하고 엄마가 주식으로 퇴직금을 모두 다 날린 후 발생한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을, 경제적인 궁핍함을, 엄마는 늘 나에게 미안해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엄마는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엄마는 믹스커피를 즐겼다. 맥심보다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를 사랑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엄마는 커피와 프리마, 설탕을 직접 2:1:2의 비율로 넣어 타 먹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원두커피를 내려 먹을 수 있는 5만원 남짓한 커피메이커를 사서 내가 원두커피를 내려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엄마 옆에서 나도 자연스레 커피를 즐기게 되었다. 대학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늘 원두커피를 내려 먹곤 했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원두커피 메이커는 집에서 자취를 감췄고, 다시 믹스커피를 타 먹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에게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대학 때 집에서 마셨던 원두커피의 맛보다 조금 더 진한 커피 맛이 바로 아메리카노의 맛이었다.

콜센터에 취직을 해서 상담사가 되어 첫 월급을 받은 날, 나는 엄마에게 커피전문점에 가자고 하며 엄마의 손을 잡고 집에서 나와 가까운 커피전문점에 들어갔다.

아무거나 시켜도 된다고, 월급 받았다고 말하며 엄마에게 메뉴를 고르라고 하자, 엄마는 가장 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날 이후 엄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달지 않고 가장 담백하면서 가장 값이 저렴한 커피. 엄마는 부담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겼다.

사실 나는 까페라떼나 카푸치노를 더 좋아했는데, 엄마와 함께 커피를 마실 때에는 늘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엄마는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마지막 면회 날에도 엄마는 내가 준비해 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아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영원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마지막으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던 엄마는 그 면회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면회 후 두 달 동안 나는 업무에 치여 면회를 가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마는 병실에서 나를 기다리며 쓸쓸히 시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혼자 외로워하면서.

엄마가 죽었다는 연락을 아버지에게서 받은 나는, 그렇게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와 단둘이 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누워 있는 엄마 모습이 너무 곱다고 하시며 아버지는 눈물을 보였다.

“니네 엄마가 이렇게 미인인 줄 나는 몰랐다.”

라고 말하며 아버지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엄마는 화장터에서 한 줌의 가루가 되어 경기도의 한 작은 산에 뿌려졌다.

아버지는 장례기간 내내 애달파했고, 나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실감나지 않았고, 그래서 무덤덤했다. 십년 넘게 투병하던 엄마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 약간은 자유로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슬픔보다는 무덤덤함, 늘 나를 구속하던 엄마에게서 벗어난 약간의 자유로움. 그것이 내가 장례식날 느꼈던 감정이었다.

장레식 기간 내내 나는 육개장을 먹었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어도 나는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었고, 비통해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장례식장을 지켰고, 이따금씩 아버지와 한마디씩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잔잔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영하 12도의 기온을 기록한 추운 겨울날, 그렇게 엄마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혼자 떠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후 시계를 본다. 8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서둘러 커피전문점의 문을 열고 나와 콜센터 사무실이 위치해 있는 지식산업센터 건물 안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갑자기 깊은 피곤이 몰려오며 온몸이 나른해진다. 한없이 깊은 외로움이 몰려온다. 또깍또깍 다시금 시계바늘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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