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국수

시장 야채 가게 한쪽에 천수무가 쌓여 있다. 아담한 천수무가 싱싱하고 맛있게 생겼다. 문득 엄마가 담가주셨던 오래전 유년 시절의 동치미 물김치가 생각난다. 추운 겨울밤, 찐 고구마에 동치미 물김치를 마시며 보냈던 유년 시절의 긴긴 겨울의 추억.

생전 처음으로 천수무를 한 다발 사와 동치미 물김치를 담가본다. 유투브를 몇 편 보고 동치미 물김치를 담그는 것에 처음으로 도전해 본다.

일단 천수무를 깨끗이 씻어 천일염에 야무지게 굴려 차곡차곡 통에 담아 절인다.

*

남자는 동치미국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남자는 중국 국적을 가졌다. 엄밀히 말해, 중국 국적을 가진 동포, 흔히 말하는 조선족이었다.

“식사에 초대할게요.”

라고 나는 같이 차를 마시다가 섣부른 약속을 해 버렸다.

동치미국수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충동적으로 소고기를 조금 굽고 동치미국수를 만들어 남자를 초대해 식사를 한 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9평 남짓한 작은 원룸형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지만, 식사 한 끼 초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동치미 김치를 담글 줄 알아요?”

잉글리시 머핀을 먹다 말고 남자는 신기한 눈빛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네이버가 있잖아요? 구글도 있고!”

라고 나는 화이트 초컬릿 모카커피를 마시며 답했다.

남자는 머핀을 마저 한 입 베어 물며 피식 웃었다.

남자는 나보다 4살 연하였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몇 달 동안 근무를 하며 우리는 조금씩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남자는 생산라인의 과장이었고, 나는 품질관리팀의 주임이었다. 남자는 터프한 성격이면서도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고, 나는 그런 남자의 모습에 조금씩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자는 업무상으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늘 자상하게 배려해 주고 모르는 것들을 알려주곤 했다.

야간근무 관리자로 같이 근무를 하고 퇴근을 하던 어느 날 아침, 남자가 나에게 양꼬치구이에 맥주를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나는 평택 시내에서 그와 단둘이 양꼬치구이에 생맥주를 마시며 처음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남자는 중국에 계시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고 있다고 했다. 남자의 딱한 사연을 들으며 나는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동생 이야기를 애써 꺼내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묻어두고 싶은 비밀이 있는 거니까.

남자는 객관적으로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고, 덩치가 조금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뚱뚱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느라, 먹고 사느라,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듣고 나서 왠지 그에게서 거리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부터 간간이 남자와 나의 개인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직장동료로서 간단히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가벼운 식사를 한 끼 나누는 정도의 데이트였다.

그는 동치미국수를 좋아한다고 했다. 연변 출신인 그가 동치미국수를 좋아하는 게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동생도 동치미국수를 좋아했다. 동생은 삼십 대 초반에 식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동생을 보며 나는 속으로 울었다. 동생은 희망이 없었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세상을 떠났다.

동생의 죽음 이후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 내 옆에 늘 있어 줄 것만 같았던 동생이 식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나도 언젠가는 갑작스레 세상과 결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맏딸이었던 나는 졸지에 외동딸이 되었고, 남동생이 있었던 나는 졸지에 혼자가 되었다. 동생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나는 동생의 존재를 잊고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

“유방암이래.”

라고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무슨 젊은 나이에 유방암이야.”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위로도 대체로 비슷했다.

“유방암은 예후가 좋은 암이라서 괜찮을 거야. 치료 잘 받아.”

나는 유방암 4기의 암 환자이다.

근 10년 전부터 오른쪽 유방 부위의 기분 나쁜 통증이 계속되었다. 찌릿찌릿하면서 따끔따끔한 기분 나쁜 통증이었다. 통증은 곧 부분적인 피부 궤사로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분 나쁜 통증의 횟수가 잦아지자, 나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며 무심코 그 말을 했고, 친구는 놀란 목소리로 빨리 집 근처의 가까운 유방외과에 예약해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우리 나이에는 이제 건강도 챙기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집에서 도보로 25분 거리에 유방외과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곳에 전화해서 진료 예약을 했다. 그리고, 유방암 검진을 받았다.

초음파 검사를 하며 의사는 나에게 유방암이라고 말했다.

“유방암 확률이 있다는 거죠?”

라고 나는 의사에게 되물었고. 의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유방암이예요.”

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조직검사가 필요하다고 하며 조직의 일부를 떼었다.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를 전화로 통보받았는데, 유방암이 맞다고 했다.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초기가 아니라고,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슬라이드를 몇 장 준비해 줘야 하는지 치료받을 대학병원에 확인해서 연락 달라고, 그러면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K 대학병원 유방외과에 예약한 후 진료를 받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유방외과 의사는 진료 첫날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굳이 항암치료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의사는 표정으로 그런 나의 생각을 읽었다. 적극적인 치료 의지가 없었던 나에게 의사는 치료를 강권했다.

“아직 나이도 젊은데…”

라고 말하며 의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의사는 답했다.

“5년 생존을 목표로 합니다. 종양내과에서 항암약을 처방해 줄 거에요. 종양내과 진료 예약해 드릴게요.”

나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아 부모님을 생각해서 나는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종양내과 의사는 유방암 치료를 위해서는 난소제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치료 도중 난소암 발생 위험이 매우 높다고 하며 난소를 제거하고 와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복용할 항암약도 난소제거를 한 환자에게만 의료보험 혜택이 주어지는 신약이었다.

뜬금없이 멀쩡한 난소를 제거해야 한다니 나는 황당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알았다고 답했다. 내 몸에서 그다지 의미가 없는 난소 하나쯤 떼어낸다고 해도 내 삶은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은 생각도 들었으나 나는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부모님을 생각했다. 동생이 죽고 부모님은 많이 힘들어했고, 하나뿐인 나에게 많이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치료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나의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15분쯤 걸어가면 위치 해 있는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의 개인종합병원 안의 산부인과에 가서 예약하고 진료를 받고 난소제거 수술을 했다. 여의사는 내 난소가 건강하다고 하며, 난소를 제거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만류했으나, 나는 항암치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제거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여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술 날짜를 잡아주었고. 수술을 해줬다.

“주기적으로 자궁 검사를 해야 해요.”

라고 여의사는 내가 퇴원하던 날 나에게 말했다.

종양내과 의사가 처방해 준 항암약을 복용하면서 유방외과 담당 의사에게 오른쪽 유방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오른쪽 유방을 전절제해야 해요.”

유방외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차라리 양쪽 유방을 다 잘라 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른쪽 유방만 전절제하면 된다고 하며.

추석 연휴 전날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이 밀려 있어서 그날이 아니면 수술이 몇 달 뒤로 밀린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서 택해 준 날짜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을 이틀 앞두고 나는 K병원 본관 4층 45병동 4518호실에 입원했다. 입원한 다음 날 새벽 1시에 나는 깊은 잠을 자다가 깼다. 간호사가 혈압과 체온을 재러 왔다.

“혈압과 체온 모두 정상이예요.”

간호사는 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술 날 아침이 되었다.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 보니 기분이 오묘했다. 간호사가 내게 와서 내가 4번째 수술 환자이며, 수술은 2시간 반쯤 걸린다고 했다. 전절제라 피부이식수술까지 해야 해서 성형외과 협진 수술이었다.

“전절제 부위가 너무 넓어서 허벅지의 피부를 얇게 떼어서 수술 부위에 붙여야 해요. 피부이식수술은 성형외과에서 해 줄 거예요.”

유방외과 의사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수술을 앞두고 나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전신마취를 했고, 그리고 나서 깨어보니 내가 회복실에 누워 있었다. 수술은 어느새 다 끝나 있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오랫동안 안 깨어나셔서 걱정했어요.”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죽음이라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냥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느낌의, 고통도 없고 세상의 무게도 없는, 그냥 의식 없음의 상태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일주일 동안 입원 후 나는 서둘러 퇴원했다. 병원보다는 나 혼자만의 공간인 내 집이 좋았다. 오른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2주의 기간 동안 나는 소고기를 몇 팩 사다가 구워 먹으며 끼니를 때웠고, 며칠에 한 번씩 집 근처의 재래시장 한쪽에 위치해 있는 동네 미용실에 가서 비용을 주고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팔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수술 후 첫 진료 때, 의사는 나에게 암 크기가 6.5cm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른쪽 겨드랑이의 림프절도 6개 떼었다고 말했다.

나는 몇 기냐고 물었고 의사는 답했다.

“4기예요.”

라고.

한순간에 내가 암 환자가 되었다는 게 나는 그때까지도 실감 나지 않았다.

“얼마나 살 수 있어요?”

라고 나는 상투적인 질문을 했고, 의사는,

“항암약을 꾸준히 잘 복용하세요.”

라고 말하며 정확한 대답을 피했다.

4기와 말기는 다르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항암약을 먹었다. 처음 항암약을 먹던 한 달 동안은 매일 같이 구토를 하고, 먹은 음식들을 다 게워 냈다. 나는 내 입 안에서 지독한 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먹어야 버틸 수 있어서 소고기 한 팩을 사다가 한 조각씩 구워 먹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토할 때가 많았다.

약을 복용한 지 두 달이 넘어서부터 약 부작용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식욕은 없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애써 생각해 내며 먹기 위해 노력했다. 살려면 먹어야 했다. 뭐든, 뭐라도 먹어야 했다.

그 이후 나는 정상인처럼 똑같이 밥을 먹고 생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때로는 호중구 수치가 낮아져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호중구를 높여준다는 음식들, 이를테면 추어탕이나 장어탕 같은 것들을 먹으며 버텼다. 그리고 비타민을 복용하듯 항암약을 편하게 복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늘 호중구 수치를 신경 써야만 했다. 나는 되도록 잘 먹으려고 노력했고, 체중은 5kg가 늘어났다.

항암약을 먹은 지 3년이 막 지났을 때 나는 내성이 생긴 것도 아닌데 자의로 약을 끊고, 번잡한 서울을 떠나 연고가 없는 평택으로 이사를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죽음이라는 게 멀게만 느껴졌는데, 정상인과 똑같이 잘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나는 한 번씩 내가 죽는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여 뭔가를 상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까지나 기약 없는 암 환자로 살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일을 구했다.

다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품질관리팀 주임이라는 직책으로. 대학 때 전공이 공학 쪽이라서 운 좋게 지금 다니고 있는 H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해 갔고, 점점 건강이 좋아졌다. 품질관리팀의 업무가 불량이 나오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경 쓰이는 일들도 많았지만, 적성에 잘 맞았다. 남자는 그런 나를 업무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내 상사이기도 했고, 또 나에게 자상하게 일을 알려주는 직장동료이기도 했다.

“면역력이 없어서 야간에 일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주간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으로 다시 구해보는 게 어때요?”

라고 의사는 내게 권유했으나,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유방암이래.”

라고 말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했으나, 나는 엄마에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엄마의 안부를 물었고, 잘 지낸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엄마가 만들어 줄게.”

엄마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유방암이래.”

나는 아버지에게 새로운 직장에 입사해서 첫 월급을 받던 날, 전화해서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그리고 즐겁게 살아.”

아버지는 착잡한 목소리로,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짧게 답했다. 요즘은 약이 좋아서 오래 사니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치료 잘 받아.”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유방암 치료를 끝내고 나는 김치를 담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참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직장인으로 살아왔던 시간들 속에서 김치를 담그거나 정성 어린 요리를 해 본 기억이 없었다. 늘 엄마가 해 주는 요리를 먹으며 살았고, 혼자 살면서부터는 엄마가 챙겨준 밑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갑자기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나의 요리를 먹여주고 싶었다.

“연애를 해봐.”

전 직장동료로 가깝게 지냈던 동생이 나에게 권했다.

누군가와 다시 잠을 잘 수 있을까.

한쪽 유방을 베어내고 난소를 제거한 상태로 누군가와 다시 잠을 잘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에게 더 이상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며칠 전 담가 둔 동치미 물김치가 먹기 좋게 새콤해졌다. 비번인 토요일 날, 나는 남자를 늦은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동치미 물김치가 맛있게 익었어요. 괜찮다면 국수 말아 드릴게요.”

남자는 멋쩍어하면서도 좋아했다.

“맛있네요. 진짜 직접 김치를 담근 거예요?”

국수를 먹으며 남자는 그렇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연신 맛있다고 하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늦은 점심 식사로 소고기구이와 동치미국수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사내 연애는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인다운 터프함이 매력이었고, 나는 간간이 그의 말투와 행동이 왠지 웃겼다. 고지식함, 성실함, 융통성 없음, 그러면서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 그것이 내가 그 남자에게 붙인 나만의 수식어구였다.

동치미국수를 남자에게 대접한 날 이후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연변이 어딘지 알아요?”

“그럼요. 당연히 알죠.”

“언제 기회가 되면 연변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요.”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별 차도가 없고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병명을 물었으나 그는 정확하게 답을 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아버지를 모셔 와 서울의 병원에서 치료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에도 그는 답이 없었다.

남자는 며칠에 한 번씩 내 집에 와서 내가 한 요리를 먹어주었다. 나는 남자를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처음 해 보는 요리를 누군가가 먹어준다는 것이 나에게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이젠 죽어도 살아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에게 요리를 먹여주며 나는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든 전복 버섯 삼계탕을 함께 먹었던 그날 밤, 남자는 처음으로 내 침대에서 나와 함께 잠을 잤다. 한쪽 가슴이 없는 나를 그 남자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미안해.”

한쪽 가슴이 없는 게 미안해서 나는 남자의 품 안에 안겨 그렇게 속삭였고, 남자는 정색하며 말했다.

“괜찮아. 뭐가 미안해.”

라고.

아침이 되어 남자를 보내고 나는 방 구석구석을 대청소했다.

남자는 나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갖게 해 주었다. 쉬는 날이면 우리는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잠을 잤다. 나는 점점 그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조선족하고 연애를 한다고? 그것도 직장 상사랑?”

내게 연애를 권했던 동생은 나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그리고 나의 연애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나는 웃기만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선족은 왠지 좀 무섭지 않아? 괜찮아 언니?”

라고 동생은 나에게 물었다.

그 무렵 신림역 칼부림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조선족이 길을 가던 행인을 칼로 살해한 사건이었고 이 사건은 며칠 동안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한국에서 일을 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중국인. 그리고, 한국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조선족’이라는 타이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색안경을 끼게 만들었다.

중국교포, 조선족, 그리고 중국인이라는 단어로 불리워지는 그들의 존재가, 한국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중국 사회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중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변방의 민족 조선족이라는 존재가 왠지 슬프게만 느껴졌다.

*

“아버지가 위독하시대. 중국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내가 만들어 준 쭈꾸미 비빔밥을 먹으며 남자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쭈꾸미 비빔밥을 다 먹은 후 남자는 보헴 시가 넘버3를 한 개비 꺼내서 담배를 피웠다. 남자는 이따금 한 번씩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도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의 담배는 디스 오리지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루에 한 갑 반씩 담배를 피워댔다. 담배를 줄이라고 잔소리를 할 때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버지의 흡연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보름간의 연차휴가 계획서를 회사에 제출했고, 승인을 받았다.

“자몽은 먹지 마세요. 자몽은 여성호르몬 수치를 높여주거든요. 자몽 외에도, 여성호르몬 수치를 높여주는 음식들은 먹지 마세요. 유방암에 좋지 않아요.”

라고 수술 후 첫 진료 때 병원에서 받은 영양 관련 교육 시간에 담당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토록 좋아하던 자몽주스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한 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가 보름간의 연차휴가 승인을 받고 중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나는 문득 간절하게 자몽주스가 먹고 싶어졌다. 새콤하고 달달한 자몽주스를 한 잔쯤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의 배달앱을 켜서 집에서 가까운 커피전문점에서 자몽주스 한 잔과 소금빵 3개, 고구마 케익 한 조각을 그날의 저녁 식사로 주문했다.

중국행 비행기가 공항을 빠져나가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을 시각에, 나는 자몽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 먹었다. 새콤하고 달달한 맛이 내 입에 꼭 맞았다. 참 오랜만에 마셔보는 자몽주스였다. 자몽주스 한 잔에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동안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살았을까. 나는 그날 곰곰이 자몽주스를 마시며 그런 생각을 했다.

*

남자가 한국에 없는 동안 나는 습관적으로 출퇴근을 반복하고, 집에 돌아와 간단한 끼니를 챙겨 먹었다. 나를 위한 요리가 하기 싫어서 냉장고에 있는 명란젓과 토하젓에 도시락김을 꺼네 밥을 싸 먹으며 대충 끼니를 때웠다.

원래 혼자였다는 게 적응되지 않을 만큼, 나는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에 길들여져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한 잔 마시며 보냈던 시간들에 적응되어, 나 혼자만의 시간이 갑자기 낯설게만 느껴졌다.

“인간은 원래 혼자야.”

언젠가 아버지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린왕자>의 한 구절처럼, 나는 어느샌가 남자와 함꼐 있는 시간에 길들여진 것일까.

회사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때우고 집에 와서 침대에 그냥 드러눕는 날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요리를 만드는 것에서 해방된 기쁨보다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괜찮으신지 갑자기 나는 궁금해졌다.

“우리 딸이 그 남자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할 때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건 잘 모르겠구, 내가 만든 밥을 먹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허전하네.”

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말없이 웃었다.

“더 적극적인 연애를 해봐.”

라고 말하며 아버지는 나를 응원해 줬다.

“인간은 원래 혼자야.”

언젠가 나에게 말했던 아버지의 말이 문득 귓가를 울렸다.

동생도, 나도, 그리고 아버지도 어쩌면 늘 혼자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우리는 혼자가 되기 싫어 누군가의 밥을 먹여주며 혼자가 아니라고 자위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침대 위에서 뒹굴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

동생의 10주기 기일이다. 매년 나는 동생의 기일을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서 표기해 두었다. 동생의 기일을 기억하면서도 따로 제사를 지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새해가 되면 문구사에서 탁상용 달력을 사서 동생의 기일에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두는 게 습관이 되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나는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국수를 삶아서 동치미 물김치에 한 그릇 말아먹는다.

텔레비전에서는 도축장에서 대기 중이던 소에게 옆구리를 받혀 축산업체의 노동자로 근무하던 60대 남성이 외상성 경막하혈종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사고를 낸 소는 이날 도축되었다고 아나운서가 보도했다.

TV를 끄고 나는 마지막 남은 국수 한 자락을 젓가락으로 건져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소는 왜 사람을 들이 받았을까. 소는 자기가 죽임을 당할 거라는 걸 알았을까. 도축장의 소들은 다들 자기의 죽음을 직감한다고 하지 않던가.

신림동의 조선족은 왜 사람을 죽였을까. 왜 그는 도축장의 소처럼 그렇게 길을 가던 행인을 들이받았을까. 왜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인생마저 들이받았을까.

내일이면 남자가 귀국을 하는 날이다.

빈 그릇을 싱크대에 놓아둔 후, 전기주전자에서 막 끓인 뜨거운 물을 머그컵에 절반쯤 붓는다. 그리고, 보리차 티백을 하나 넣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신다. 진한 보리차 맛이 내 입안에 감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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